
드라마 <굿잡>을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도 저런 파트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였습니다. 재벌 회장이 탐정으로, 초시력을 가진 여자가 그 옆에서 눈이 되어주는 이 이야기는 내 삶에도 저런 파트너들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진정한 파트너
은선우 옆에 양진모와 돈세라가 함께 움직이는 장면들을 보면서 호흡이 정말 잘 맞아 통쾌한 쾌감을 주었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상황을 읽고, 플랜 B를 이미 준비해 두고, 서로의 약점을 채워주는 그 모습이 드라마 속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현실처럼 와닿았습니다. 나도 직장에서 내 결핍을 채워주며 깊은 신뢰를 갖는 사람이 있었나? 생각하는데 저들만큼 호흡이 맞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꼭 회사 사이에서만 형성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빵을 먹고 있는 저에게 아무 말 없이 물을 건네주는 남편을 바라보니 저에게 남편이 그런 존재 였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제 상황을 알아채고 조용히 도움을 건네는 사람. 시선이 항상 저를 향해 있어서 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미리 읽어내는 남편 덕분에 제가 버텨온 순간들이 참 많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조건이나 스펙보다 이 '진정한 파트너'의 감각을 가진 사람인지를 먼저 봐야 한다는 걸 결혼 후에야 알았습니다. 선우와 세라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두기 시작할 때 관계가 달라진 것처럼, 내가 누구를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가 사실 답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진정한 파트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부러웠던 것은 돈세라의 초시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범인을 찾아내고 증거를 발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니 더 부러웠습니다. 저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써야 하는데 걸리적거려서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노안까지 시작되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번호를 읽으려면 꽤 가까이 와야 겨우 구별이 되고, 멀리서 아이들이 뛰어오면 목소리가 들려야 누구인지 알 정도입니다. 그런 제 눈으로 세라의 초시력 장면을 보고 있으면 순수하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정의감
은선우는 낮에는 은강그룹의 회장으로 냉철하게 회사를 이끌고, 밤에는 어머니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 직접 탐문하는 탐정이 됩니다. 이중적인 정체성(Dual Identity)을 가진 캐릭터인데, 여기서 이중적 정체성이란 사회적 역할과 개인적 사명 사이에서 두 개의 자아를 동시에 유지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선우의 경우 어느 쪽도 가짜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제가 어릴 때 꿨던 꿈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어릴 적 의사가 꿈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의사가 되기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피를 보면 몸이 찌릿해지면서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의사라는 꿈은 접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일하는 워킹맘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굿잡>을 보고 나서 오랫동안 조용히 있던 정의감 같은 것이 다시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마음 어딘가에는 여전히 이웃을 돕고 싶은 마음이 살아있다는 걸 이 드라마가 확인시켜 줬습니다. 굳이 초능력자가 되거나 재벌이 되어야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선우가 피해자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지금 제 자리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찾아보는 것이 현실적인 시작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바꾼 강완수
만약 강완수 부회장이 은강그룹을 집어삼키려는 야망이 아닌 원칙과 인간미를 갖춘 인물이라면 <굿잡>의 분위기는 정말 달라졌을 것입니다. 보통 드라마에서 악역은 필수요소로 등장하는데 나는 인물에 대한 희망이 더 보고 싶은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만약 강완수 부회장이 선우를 견제하기보다는 든든한 조력자로 노련한 연륜과 날카롭고 이성적인 현실반영에 은강그룹을 선우와 함께 이끌었다면 둘은 최고의 파트너로서 은강을 성공적인 신화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또한 김재하를 외면하지 않고 일찍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품어주었다면 재하의 인생도 180도 달라졌을 것이고, 재하와 강태준과의 관계도 티격태격할 수는 있어도 서로의 결핍을 잘 채워주며 아버지를 보필하는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독하게 차갑고 외로웠던 중년의 야심에서 내 잘못을 바로 잡고 아들들을 지키며 선우와 끈끈한 파트너로 단단한 어른처럼 설정되었다면 드라마는 세대를 뛰어넘는 든든한 연대와 따듯한 가족 성장의 <굿잡>은 어쩌면 시청률은 보장할 수는 없지만 내용만큼은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훈훈한 드라마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굿잡>을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진정한 파트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는가. 재벌도 초능력도 없지만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선함을 찾아보는 것, 그게 이 드라마가 저한테 건넨 숙제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