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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우리는 (열등감, 이별, 성장)

by eunhaji 2026. 3. 5.

 

좋아하는 최우식, 김다미 배우가 나와 '그 해 우리는' 드라마를 멜로드라마 정도로 생각하고 시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연수가 웅이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장면에서 멈칫했습니다. "가난은 남들 다 하는 거 못하게 만들고, 내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힘들게 만들어. 난 그게 싫었어" 이 대사가 제 고등학교 시절을 그대로 꺼내놓은 것 같았습니다. IMF 이후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을 고민해야 할 때, 저도 연수처럼 가난이 제 선택지를 좁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드라마는 저에게 치유 이상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가난이 만든 열등감의 실체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상대적 박탈감이란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했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심리적 결핍감을 의미합니다. 연수가 웅이와의 관계에서 느낀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정은 특히 또래 집단에서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친구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데이트 비용, 택시비, 외식)이 제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데리러 오는 거 사람들 보면 창피하다"는 연수의 말은 사실 택시비가 부담스러워서였다는 게 나중에 밝혀집니다. 저도 친구들과 약속을 피하는 이유가 떡볶이 사 먹을 돈이 부족해 핑계를 대며 만남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

청소년기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한 이들의 68%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존감 문제를 겪는다고 합니다. 연수가 "가난은 점점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꺼리게 만들더라고요"라고 말한 것처럼, 가난은 관계 자체를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저는 연수와 달랐던 점도 있습니다. 불행이 나를 짓누를수록 오히려 친한 친구들에게 더 의지했습니다. 연수는 이기적으로 살기로 결정했지만, 저는 차라리 솔직하게 힘들다고 말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어떤 방식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친구들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수단이였습니다.

사랑과 이별 사이의 진짜 이유

"우리가 왜 헤어져?"라는 웅이의 질문에 연수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이별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때로 사랑했던 순간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설명합니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느끼는 심리적 불편함을 뜻합니다. 연수가 웅이를 떠난 진짜 이유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자신의 가난이 웅이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웠던 마음, 웅이의 유복한 환경과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열등감,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판단한 자존감 결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연수가 자립심이 강한 캐릭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체 우리가 왜 갚아야 되는 건데? 삼촌이라는 사람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는데"라는 대사에서 드러나듯,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마음과 어릴 적 저의 마음이 대입되면서 마치 제가 할머니이자 연수처럼 눈물이 났었습니다. 연수의 선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고민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우리 옆에는 웅 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별하지 않아도, 억지도 버티지 않아도 내가 그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잡아주는 웅이의 손을 소중하게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분들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혼자가 아닙니다.  

 

성장이 가져온 두 번째 기회

10년 후 재회한 두 사람은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웅이는 유명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고, 연수는 팀장까지 올라간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들의 변화에서 주목할 점은 '경제적 성공(Economic Achievement)'이 아니라 '심리적 성숙(Psychological Maturity)'입니다. 경제적 성공은 외적 조건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심리적 성숙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내적 성장을 뜻합니다.

연수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나 내 인생이 처음으로 좋아지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길이 뚜렷하게 보여." 가난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했던 시간들이 자신을 만든 과정이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제 경험상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동안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가난이 오히려 기회였다고 봅니다. 연수가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을 했던 것, 좋은 회사에 들어가 팀장까지 오른 것 모두 가난이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물론 사랑을 놓아야 했던 대가는 컸지만, 결국 그 시간이 두 사람 모두를 성장시켰습니다.

웅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제야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가 보여.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라는 고백은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결과입니다. 두 사람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숙제를 해결했고, 그제야 다시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가난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순간들, 그 선택이 옳았는지 계속 의심했던 시간들이 결국 두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게도 그랬습니다. IMF 이후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이 지금도 제 곁에 남아있습니다. 웅이의 말처럼 "너는 내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멋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데 10년이 걸린 것뿐입니다.

 연수와 웅이의 이야기는 모든 선택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툴고 넘어지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손잡아 일으켜주고 상대의 상처까지 안아주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가난했던 시절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 시간이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lJnHIj9A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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