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을 넘게 사귄 사람과 헤어지는 게 쉬웠을까요? 저에게는 언니 세 명이 있습니다.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10년이 넘는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맞선을 통해서나 1년도 안된 사람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언니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지금은 모두가 각자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통해 언니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별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이별의 재해석
언니들의 결혼이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함께한 사람을 왜 보내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은호를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저희 집은 IMF 외환위기 여파로 가정 형편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현실이 있었고, 언니들은 아마 그 무게를 상대에게까지 나눠주기 싫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현오는 자신이 평생 부양해야 할 다섯 명의 할머니의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은호를 사랑했지만, 그 삶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이는 게 두려웠던 겁니다. 사랑이 없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제 언니들의 이별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정서적 핵심은 죄책감입니다. 은호는 동생 해리를 졸업 여행에 억지로 보냈고, 그 후 해리는 실종됩니다. 그 사건이 남긴 외상 후 스트레스, 즉 트라우마(trauma)가 은호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트라우마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이 심리적 상처로 남아 일상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은호는 그 상처를 직접 마주하는 대신, 해리의 인격을 자신 안에 만들어 냈습니다.
은호와 해리
드라마의 핵심 설정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입니다. 한 사람 안에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인격이 존재하며, 각 인격이 번갈아 나타나 다른 기억과 행동 방식을 보이는 심리 장애를 말합니다. 흔히 '다중인격'이라고도 불립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은호가 해리로 살아간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속죄의 시간이었습니다. 동생이 꿈꾸던 주차장 알바를 직접 하면서, 해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경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현오와의 이별로 피폐해진 마음이 더해지면서, 해리라는 인격이 점점 커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심리적 기제를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합니다. 여기서 방어 기제란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반응 방식을 말합니다. 은호에게 해리는 바로 그 방어 기제의 산물이었습니다.
은호가 해리로 살아가는 동안 경험한 주연과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은호 자신이 현오와 헤어진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감정들을 해리라는 다른 이름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숨을 쉬었던 것 같습니다. 그 구조가 슬프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사실 은호도 현오도 아닌, 백혜연이었습니다. 주연을 짝사랑하면서도 질투에 눈이 멀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 했습니다. 사랑을 얻지 못해도 상대의 행복을 빌 줄 알았습니다. 보통 드라마에서 이런 인물은 악역으로 소비되는데, 혜연은 그냥 밝고 긍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건강한 감정 조절 능력, 즉 정서 조절(emotional regulation)의 모습을 캐릭터로 보여준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서 조절이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상황에 맞게 표현하거나 조절하는 심리적 능력을 뜻합니다. 이런 모습이 저에게도 저의 아이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후반부에 은호는 해리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동생을 향한 작별의 모습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해리로 살아가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한 명씩 인사하는데 너무 감동적인 장면들이었습니다. 은호가 아픔을 겪고, 동생 해리의 인격을 만들어냈다가, 결국 해리와 작별하기까지 전 과정들을 차분히 보여준 점이 드라마의 품격을 높여준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대사는 해리가 주연에게 건넨 말이었습니다. "좋아하는 동안 많이 행복했습니다." 짝사랑은 아프다고들 하는데 해리는 감사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랑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선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해리가 주연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밥을 잘 드셔야 합니다.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제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에 따르면 죄책감이 장기간 해소되지 않을 경우 우울장애나 해리 증상 등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출처: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 은호의 이야기가 드라마 속 설정만은 아닌 이유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아침에 눈을 뜰 때 생각했습니다. 가족이 "다녀왔습니다"라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해리의 말이 짚어줬습니다. 나의 해리에게는 저에게 명품 드라마였습니다. 티빙에서 풀버전을 확인할 수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쯤 시간을 내어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