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면 속 진짜 "나"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라는 존재의 다양성입니다. 극 중 이은오라는 인물이 양양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윤선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평소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모습은 참 흥미로웠습니다. 이은오가 굳이 ‘윤선아’라는 가명을 쓰고 양양으로 도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 모습에서 자신의 본래 삶이 너무나 지치고 무겁게 느껴질 때, 잠시라도 완벽한 타인이 되어 아무런 책임감 없는 주인공으로 살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대리 심정을 읽었습니다. 회사와 가정, 그리고 사회적 역할 속에서 진짜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꼈을 때, 그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온전히 자유롭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도피 욕망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상이라는 틀 안에서 직업인, 엄마, 아내, 딸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저 역시 직장인으로 근무하며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은오가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뒤로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던 그 일탈의 욕망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오늘 친구들이랑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재잘거릴 때나, 남편이 퇴근 후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를 들을 때 저는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행복을 깊이 느낍니다.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오롯이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은오가 보여준 모습은 어쩌면 완벽하게 수행해야 하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드라마 속 방식처럼 타인을 속이거나 가짜 신분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시작은 정직함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무리 일상이 버거워도 내 삶의 뿌리를 부정하는 거짓말은 결국 더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우리는 나를 숨기기보다, 일상 속에서 나를 표현할 작은 틈을 찾는 것이 훨씬 건강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법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맺는 관계를 보며 저는 아직 젊은 청춘들의 미숙한 모습들이라 보였습니다. 사랑이란 서로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과정이어야 하는데, 이들의 사랑법은 다소 즉흥적이고 감정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대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시작한 관계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과정은 안타까웠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사랑이 이렇게 가벼운 만남과 상처뿐인 이별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섭니다. 저희 집 첫째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며 때때로 친구 관계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할 때, 저는 늘 ‘진실함’의 가치를 이야기해 줍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기보다, 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알고 당당해지는 것이 중요해”라고 말해줍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조금 더 성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대면하고 솔직했더라면, 그렇게까지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은 멋진 풍경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이벤트가 아니라,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서로의 온기로 채워가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남편과 결혼 생활을 이어오며 깨달은 것은,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진심이 화려한 언변이나 이벤트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점입니다. 드라마는 사랑의 화려한 단면만을 조명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맞춰가는 지난한 노력의 산물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은오였다면
만약 제가 드라마 속 이은오였다면, 저는 결코 양양에서 거짓 신분으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성격상 타인을 속이면서까지 얻는 자유는 결코 즐겁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고, 저를 필요로 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극심한 번아웃을 겪어 도피하고 싶었다면, ‘윤선아’가 되어 사랑을 쫓는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행을 택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산책하고, 글을 쓰며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발견한 뒤,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제 자리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가면을 씁니다. 직장인으로서의 모습,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모습, 그리고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모습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은 결국 ‘나’라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입니다. 이은오가 느꼈던 갈증은 이해하지만,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지나치게 파괴적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 아이들에게,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 “너 자신을 숨기지 말고,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가운데서 진짜 행복을 찾으라”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며 화려한 연애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결국 돌아올 내 집과 내 가족, 그리고 내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대신,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상 안에서 나만의 작은 자유를 찾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현명하고도 진정한 사랑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