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스한 드라마
드라마 <리치맨>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라는 다소 독특한 소재와 거침없이 당당한 젊은 기업가의 파란만장한 성공 스토리를 생동감 넘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요소가 풍부한 작품입니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전개 방식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은 방송을 보는 내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지만 인물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이나 현실적인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일부 상황 연출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뒤따랐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보여주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가 때로는 지나치게 당당함으로 포장되거나,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하던 커다란 문제들이 너무 쉽게 우연의 일치로 해결되어 버리는 구성은 이야기의 깊이를 떨어뜨리고 몰입을 방해하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결핍을 안고 살아가던 인물들이 서로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고, 조금씩 온전한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가슴 한구석에 따뜻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듯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저마다의 깊은 상처와 넘기 힘든 한계를 짊어진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현실과소금 동떨어진 연출이나 비현실적인 캐릭터 설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보듬으며 성장해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로와 뜻밖의 즐거움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이유찬과 나의 모습
주인공 이유찬은 안면인식장애라는 아주 특별한 질환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나 역시 약간의 안면인식장애 증상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쉽게 기억해 내지 못하곤 합니다. 같은 사람의 얼굴을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은 유심히 바라보고 스쳐 지나가야 비로소 어렴풋이 외워지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누구의 엄마라는 사실이나 몇 층에 거주하시는 이웃이라는 배경 정보와 정황을 통해서만 상대를 겨우 인지하곤 합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쌀쌀맞다거나 오만하다는 식의 오해를 받아 마음고생을 겪기도 했습니다. 나쁜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차가운 사람으로 오인받는 상황이 너무나 힘들고 속상했기에, 나중에는 아예 얼굴이 긴가민가 싶은 분을 마주치더라도 무조건 먼저 밝게 인사를 건네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막상 이렇게 행동 패턴을 바꾸고 나니 오히려 사람들에게 훨씬 친근하게 먼저 다가가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지나고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의 변화였습니다. 반면에 목표를 향해 조금의 타협도 없이 사정없이 정진하는 이유찬 특유의 치열한 삶의 방식은 나와는 현저히 다른 지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여러 환경적 조건과 현실적인 여건들로 인해 그처럼 하나의 일이나 목표에만 모든 것을 던지며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신앙이 그 어떤 것보다도 절대적인 최우선순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화려한 성공이나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하루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래 목표이자 가장 큰 가치입니다.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남들과 다투고 경쟁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면서 나와 내 가족에게 맞는 편안한 속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삶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고자 합니다.
김보라에게 부러운 점
드라마 속 등장인물 김보라를 지켜보면서 가장 부럽고 부러웠던 점은 예쁜 외모도 그렇지만 더 갖고 싶었던 것은 바로 초능력자에 가까울 정도로 놀라운 그녀의 비범한 암기력이었습니다. 정작 나의 일상을 돌이켜보면 바로 어제 끼니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려 기억해 내지 못할 때가 태반입니다.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정보나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사건들은 굳이 머릿속 기억의 상자에 오랫동안 담아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꼭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들조차 간혹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려 크게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겪곤 합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나 잊지 말아야 할 약속들을 일일이 메모지에 적어두지 않으면 중요한 일을 통째로 빼먹는 안타까운 상황들이 자주 발생하여 스스로 난감해지곤 합니다. 옛날과 같지 않게 자꾸만 흐려지는 기억력과 변화하는 나의 모습에 슬그머니 쓸쓸한 감정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전만큼 머리가 똘똘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매일 손으로 메모하는 소소한 습관을 들여가며 나만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구축해 나가는 것 역시 나름대로 소박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선사해 주는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