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둔 울타리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면성 우울증 환자의 에피소드는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렸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하고 밝은 모습으로 가족을 수발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철저히 억누르며 살아가는 모습은 희생이라는 울타리에 자기를 가둔 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 역시 엄마이기에 가족을 위한 희생이 감사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 내가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까지 늘 살펴봅니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을 돌볼 수도 있고 지켜낼 수도 있는 거니, 수많은 부모들이 가족을 향한 희생에 앞서 자신의 모습을 먼저 봐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갉아먹으며 유지하는 평화는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며, 부모의 몸과 마음이 건장해야 가정도 비로소 단단해집니다. 또한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는 삶도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20대와 30대에는 주변의 시선을 정말 신경 많이 썼는데, 40대가 된 지금은 그럴만한 체력도 없고 귀찮습니다. 특히 남들의 시선에는 이젠 별 신경 안 쓰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면 굳이 연극하지 않아도 되고, 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인정받도록 하는 편이 훨씬 삶을 가볍고 자유롭게 만듭니다. 남의 눈에 비친 완벽함보다 내 안의 편안함이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타인의 평가라는 헛된 굴레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게 됩니다. 드라마가 이러한 현실적인 아픔을 과장 없이 짚어낸 점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만
남자주인공 최수현의 행동은 시청하는 내내 깊은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상대의 진심을 시험하려 드는 모습은 명백한 오만이이자 상처 입은 아이의 떼쓰기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의 거룩한 감정을 수치화하고 정교한 가설 속에 가두려는 태도는 전문가라는 탈을 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고혜림을 임상실험 대상으로 삼아 거짓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을 흔들어 놓는 설정은 드라마적 재미를 넘어 윤리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지점입니다. 상처받기 두렵다는 이유로 타인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고 시험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사라면 남의 마음을 수술하기 전에 자신의 상처부터 똑바로 직시하고 치유했어야 합니다. 사랑은 머리로 계산하는 정답 맞추기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용기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상대의 진심을 한낱 가설의 증명 도구로 여겼던 그의 오만한 방어기제는 스스로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내몰았을 뿐입니다. 물론 완벽해 보이는 전문가가 내면의 결핍으로 파멸하고 다시 재건되는 과정은 로맨스물로서 훌륭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을 고친다는 인물이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이용했다는 한계는 지울 수 없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무겁게 여길 줄 모르는 지식은 공허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최수현이라면
내가 최수현이라면 상대를 시험하는 어리석은 가설 따위는 당장 버렸을 것입니다. 상대의 심리를 단번에 파악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졌으면 나와 반대인 고혜림의 방식에도 존중하고 그녀만의 방식도 배워보려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은 냉정한 학술적 이론이나 차가운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수치나 기호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 말 한마디로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인간적인 직관이야말로 때로는 그 어떤 명약보다 뛰어난 치유력을 발휘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냉철한 판단력뿐만 아니라 융통성도 필요하고 인간적인 마음도 필요합니다. 둘 다 합쳐진다면 나의 능력이 더 높아질 것입니다. 남을 지배하거나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능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데 사용한다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이론에 인간적인 따스함이 더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과 치유가 시작됩니다. 잘난 체하며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천재보다는, 조금은 허술해도 타인과 온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삶이 훨씬 가치 있습니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 삶은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집니다. 나 역시 삶을 살아가며 나의 기준만을 고집하기보다, 나와 다른 타인의 방식을 너그럽게 품어주는 유연함을 계속해서 배워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