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쉼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가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드라마 <맨도롱 또똣>은 그런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며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었습니다.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에 지쳐 제주도로 내려간 이정주와, 그곳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백건우의 이야기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삶의 쉼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한 뒤,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을 마주할 때면 저 역시 문득 이정주처럼 ‘나만의 맨도롱 또똣(기분 좋게 따뜻한)’한 공간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 남편과 초등학생 두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제주도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관광지를 돌아다니기보다, 그저 조용한 바닷가 앞 카페에 앉아 아이들이 모래장난을 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남편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평범한 순간이 준 위로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일상에 치여 서로에게 날카로워져 있던 가족들이 제주도의 느긋한 공기 속에서 비로소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 정주가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제주도라는 낯선 공간에서 치유를 얻었듯, 우리 가족에게도 그 여행은 팍팍한 삶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작지만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드라마는 이처럼 지친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를 건네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진정한 온도를 되찾아 줍니다.
관계의 온도
드라마를 보는 내내 백건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시청자로서 애정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건우는 겉보기에는 한없이 다정하고 낭만적인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하리만큼 철이 없고 이기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주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한 걸음 물러서거나, 자신의 감정에만 솔직해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행동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현실적인 고민으로 하루하루가 절박한 정주의 상황에 비해, 언제나 여유롭고 대책 없는 건우의 태도는 가끔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의 유희처럼 느껴져 씁쓸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실에서 이런 남편이나 파트너를 만난다면 매 순간이 갈등의 연속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관계의 온도’에 대해서는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건우의 대책 없는 천진난만함이 있었기에 정주의 굳어 있던 마음의 빗장이 열릴 수 있었고, 반대로 정주의 단단하고 생활력 있는 모습이 있었기에 건우 역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서서히 서로에게 닮아가며 마침내 '기분 좋게 따뜻한' 온도를 찾아가는 과정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현실의 부부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남편 역시 성격도, 세상을 바라보는 온도도 무척이나 다릅니다. 가끔은 서로의 차이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부족한 온도를 채워주고 맞춰가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가족이 되어감을 느낍니다. 드라마는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닙니다.
내가 백건우라면
만약 제가 드라마 속 백건우였다면, 저는 정주에게 조금 더 일찍 그리고 조금 더 명확하게 제 마음을 표현하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물론 건우에게도 나름의 사정과 마음의 상처가 있었고, 정주를 향한 감정이 사랑인지 동정인지 혼란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인생이 걸린 절박한 상황 앞에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상대의 마음을 시험하거나 흔드는 행동은 자제했어야 마땅합니다. 정주는 서울에서의 삶을 모두 잃고 마지막 희망을 품고 제주도로 내려온 절박한 처지였습니다. 그런 정주에게 건우의 장난스럽고 가벼운 태도는 희망 고문이자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었음을 건우는 더 깊이 헤아렸어야 했습니다. 내가 만약 건우의 입장이었다면, 먼저 레스토랑 '맨도롱 또똣'을 정주와 함께 진지하게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동반자로서의 신뢰를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말로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넘어, 정주가 제주도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책임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내 감정이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정주가 혼란스럽지 않게 배려하고, 마음의 확신이 선 순간에는 남들의 시선이나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곧바로 정주의 손을 잡아주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유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묵직한 책임감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주에게 더는 외로움과 불안감을 주지 않고, 언제든 편히 기댈 수 있는 든든하고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제가 건우였다면 선택했을 가장 최선의 행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