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과 삶
드라마 메모리스트를 보며 인상 깊었던 점은 인간의 기억이 가진 힘입니다. 타인의 기억을 스캔하는 동백과 기억을 마음대로 지워버리는 지우개의 대립은 흥미로웠습니다. 극 중 등장인물들이 각자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은 일상과 닮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잊고 싶은 순간도 있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순간도 존재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관계나 학부모 모임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갈등 속에서도 기억은 사람을 흔들어 놓습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차 한 잔을 나누며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곤 합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뵐 때면 세월의 흐름 속에 흐려지는 기억들이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어릴 적 소중했던 추억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집니다. 반면 털어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들은 오히려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삶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작품은 이러한 인간의 기억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초능력이라는 요소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통쾌함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성이 떨어져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수사극으로서 전개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극단적인 설정이 이어지다 보니 인물들의 감정선에 깊이 공감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지배하고 뒤흔들 수 있는가를 가감 없이 보여준 점은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우리 삶도 결국 기억의 집합체입니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상의 기록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지나간 날들의伤痕을 껴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극은 또 다른 의미의 위로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아픔을 삭제
서희수라는 인물은 사적 제재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물이 되어버린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만약 서희수와 같은 능력이 주어진다면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는 권능이 있다면 아프고 어두운 과거에 갇혀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고자 합니다. 가정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일 밤 불안에 떠는 이들, 성폭행이라는 잔혹한 범죄로 영혼이 찢겨나간 피해자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이 능력은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심리치료나 오랜 상담도 상처를 보듬는 좋은 방법이지만 트라우마가 남긴 흉터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그 잔인했던 순간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줄 수 있다면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악몽 같은 순간들을 지워내고 평온한 일상을 되찾아주는 일이야말로 참된 치유입니다. 직장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접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아픔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큰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습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이웃의 숨겨진 아픔이나 뉴스에서 들려오는 가슴 아픈 사고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초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에서 겪는 크고 작은 상처들도 보듬어주고 싶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극 중에서 그려진 지우개의 폭주는 그 능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였을 때의 위험성을 잘 보여줍니다. 사적 복수가 아닌 진정한 구원을 위해 능력이 쓰였다면 드라마의 비극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픈 기억을 지워주고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능력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쓰임새입니다.
동백의 능력
마지막으로 동백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우선 아기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들은 이유 없이 울거나 떼를 쓰며 보채는 일이 많습니다. 초보 엄마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이가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어 밤을 지새우며 함께 울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어디가 아픈 건지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그저 무서운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습니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가끔은 아이들의 속마음을 다 알지 못해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동백처럼 신체 접촉으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어린아이들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해소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채어 다정하게 보듬어주는 엄마가 될 수 있다면 육아의 고충도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한편 이 능력은 세상의 정의를 바로잡는 데에도 꼭 필요합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구하고 진범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사 과정에서 수많은 거짓말과 변명이 난무하고 권력 뒤에 숨어 벌을 피해 가는 악인들을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집니다. 동백의 능력을 통해 진실을 명명백백히 가려내어 범죄자들이 마땅한 법의 처벌을 받게 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고 싶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며 마주치는 수많은 오해와 거짓 속에서도 진실을 가려내는 힘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드라마 속 동백의 초능력이 통쾌함을 주었던 이유도 현실에서 느끼는 불의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파헤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 꼭 필요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