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명불허전 (조선 의료, 현대 의학, 의사의 소명)

by eunhaji 2026. 4. 3.

 

조선시대 명의 허임이 현대로 건너와 흉부외과 의사 최연경을 만나면서 여러 가지의 일들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의술의 본질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저로서는, 30년이 지난 지금 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그때는 삐삐로 연락하고 싸이월드로 관계를 맺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학생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마음, 사람을 살리려는 의사의 마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라마 작가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조선 의료 체계

조선시대 의료 시스템은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허임은 혜민서 의관으로 일하며 뛰어난 침술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천출 신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혜민서(惠民署)'란 조선시대 국가가 운영하던 무료 의료기관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하던 곳입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시 의료 접근성은 극도로 제한적이었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치료가 먼저였고, 평생 의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 천민이나 일반 백성이 태반이었습니다. 저는 드라마 속 이 장면들을 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건강보험 시스템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조선 후기 의료 상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참혹하게 죽어갔습니다. 약재는 궐에서 모두 가져가고, 의원들조차 피난을 가버린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는 의료시설이 훨씬 좋아졌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응급실에 제대로 응급환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급대원이 일일이 병원에 전화해 환자를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하는 아날로그식 대응이 시간지체의 문제점이 되며 전문의 부족이나 병실부족 등의 이유로 결국 골든타임을 놓쳐 생명을 잃는 순간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환자를 살리는 병원에서 환자를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시스템이 하루빨리 바뀌어보길 희망합니다.

현대 의학 기술

2017년 서울, 흉부외과 전문의 최연경은 최첨단 의료 장비로 무장한 병원에서 일합니다. 그녀가 집도한 대동맥 치환술(Aortic Replacement)은 조선시대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수술입니다. 대동맥 치환술이란 손상되거나 확장된 대동맥을 인공 혈관으로 교체하는 고난도 심장 수술로, 보통 6시간 이상 소요됩니다(출처: 대한흉부외과학회).

저는 드라마 속 수술 장면들을 보며, 현대 의학이 얼마나 정교한 분업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는지 깨달았습니다. 마취과, 흉부외과, 심장내과가 협진하고, 수술 전후 집중 관리가 이어지는 시스템은 조선시대 의원 혼자서 모든 진료를 책임지던 방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조선시대 의원은 내과, 외과, 소아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질병을 다뤘지만, 현대는 각 전문의가 있어 전문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병원을 내원할 때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각 분야별로 세세하게 더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또한 AI 도입으로 의사손보다 정교한 로봇이 수술을 하기도 하며 사람이 놓치는 부분도 잡아주는 똑똑한 로봇의사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최연경이 마주한 딜레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VIP 환자를 우선 배정받는 관행, 성공 확률이 낮은 수술을 기피하는 의사들, 의료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 드라마는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오하라라는 심장병 소녀가 나옵니다. 네 가지 심장 기형이 동시에 나타나는 질환으로 제때 수술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인데 수술을 거부합니다. 수술 후에도 어차피 아플 것이라는 반복되는 절망과 사춘기 소녀에게 가슴에 큰 흉터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엇나가는 마음을 잡아준 건 AI로봇도 아니고 최연경의사도 아닌 조선시대에서 온 허임이었습니다. "네 심장이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지 들어보라" 이 말은 오하라의 진심을 알아봐 준 것 같습니다. 사실 두려움이 컸던 오하라는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아봐 주고 위로해 주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당연한 진리입니다. 수술은 사람보다 AI로봇이 더 잘할 수는 있어도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것은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의사의 소명

허임과 최연경이 각자의 시대에서 보여준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없는 환자라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걸고서라도 생명을 구하려 했던 그들의 선택은 시대를 초월한 의사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드라마 장면 중 허임이 왜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선을 침략한 적국의 병사를 살려야 하는가? 최연경은 말합니다. "의사 눈앞에 있는 건 그냥 환자일 뿐"이라며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제가 의사라면 고쳤을까요?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데 환자의 신분, 종교, 인종,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치료함을 선서합니다. 하지만 범죄자를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굉장히 마음이 어려울 것입니다. 범죄자라는 이유로 치료하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범죄가 되어 문제가 생기게 되겠고 치료하자니 엄청난 심리적 거부감이 몰려올 것입니다. 제 친구의 남편이 의사라 이런 상황에 대해 의사의 마음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죄는 법적으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니 본인은 의사로서의 할 일만 한다고 합니다. 감정을 분리하는 것이 편하게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얘기해 줍니다. 어떤 환자든 의사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허임과 최연경을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임이 침통을 들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최연경에게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대 세상의 의술이었다면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까?" 반대로 최연경도 허임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의 세상에서 오늘 당신은 또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만났을까?" 이 교차된 질문은, 완벽한 의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의사의 소명임을 일깨웁니다.

조선시대에는 약재 부족과 지식의 한계가, 현대에는 의료 불평등과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두 시대 모두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의학은 발전해 왔습니다. 허임이 노비의 목숨을 구하다 곤욕을 치른 것처럼, 최연경이 성공 확률 낮은 수술을 자청해 주변의 만류를 받은 것처럼, 진정한 의사는 언제나 '옳은 선택'과 '안전한 선택'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저는 90년대 학교를 다니며 집단주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 명이 잘못하면 전체가 벌을 받고, 참고 견디는 게 미덕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제 아이들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받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시대가 변해도 '옳은 일을 선택하는 용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드라마는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허임이 다시 현대로 돌아와 최연경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끝이 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결말이 아쉬웠습니다. 각자의 시대로 돌아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또한 인간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완벽한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두 사람이 각자의 시대에서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응급실에서는 누군가의 심장이 멈추고, 수술실에서는 의사들이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든 21세기든, 침이든 메스든, 도구는 달라도 의술의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의료 혜택에 감사하는 동시에, 여전히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허임과 최연경이 시간을 넘어 주고받은 질문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Dq_S7sUV0w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