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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의 낭군님 (왕세자 원, 살수 무연, 주체적인 삶)

by eunhaji 2026. 5. 27.

 

드라마 속 원득이를 보다가 문득 제 과거가 생각났었습니다. 기억을 잃고 서툴게 살아가는 왕세자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도 한때 완전히 낯선 환경에 던져져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그냥 재미있는 사극 로맨스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왕세자 원득

원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세자 이율의 모습이 처음에는 그냥 웃겼습니다. 궁에서 태어나 온갖 것을 갖춘 왕세자가 기억을 잃고 나니 지게 하나 제대로 못 드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린이집 보조교사로 일했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저는 나름 교육기관에서 팀장까지 맡았고, 평가인증(교육 기관이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지 심사받는 공인 제도)을 통과하는 핵심 업무도 도맡았습니다. 기관의 교육 환경과 교사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이며 이 정도면 어느 직업을 가져도 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응가를 하고, 한 명은 친구를 때리는 상황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었습니다. 분리불안(아이가 양육자와 떨어지는 상황에서 극도로 불안해하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아이를 달래는 것도, 또래 간 갈등을 중재하는 것도 제가 알고 있던 어떤 지식과도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담임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현장이 돌아갔던 것이고, 저는 그분들을 보면서 처음부터 다시 배웠습니다.

원득이가 홍심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생활 방식을 배우는 모습이 그래서 낯설지 않았습니다. 신분이 높다고, 과거에 뛰어났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린이집 현장에서도 소근육 발달(영유아기에 손과 손가락 등의 작은 근육을 조절하는 능력이 자라나는 과정)을 이해하고,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춰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역량이었습니다. 세상 사는 법은 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운다는 것, 원득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살수 무연

드라마에서 살수 무연의 이야기는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집안 전체가 몰살당하고, 어린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부하로 들어가 자객으로 살아가는 서사. 드라마적 서사 구조(캐릭터의 내면적 동기와 외적 행동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전개되는 이야기 방식)를 잘 활용한 장면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꽤 현실적이었습니다.

저도 부모이기에 무연의 선택이 이해됩니다. 깊이와 무게가 다를 순 있지만 무연이가 여동생을 생각하듯이 저도 아이들을 위해 크고 작은 일들을 합니다. 학원에 데려다주는 것, 수영장에서 아이가 나올 때까지 노트북으로 일하며 기다리는 것,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것 등등 부모이기에 자식을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줄 수 있기에 더욱 기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일에 지쳐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어지러운 적도 많지만 아이들이 여기서 더 크면 저를 찾는 일이 줄어들 테니 지금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행복임을 압니다. 무연처럼 목숨을 건 선택은 아니지만, 제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작가는 무연을 외롭게만 두지는 않았습니다. 감정을 지우고 살아야 했던 삶에서 세자빈 소혜와 사랑을 했고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살아있는 동안 따듯한 온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길이 허무하거나 외롭지만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주체적인 삶

드라마 속 홍심이가 한 말에서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대사입니다. 홍심의 서사 맥락에서는 모진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체념에 가까운 지혜처럼 들립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공감이 됐습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저는 이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파도에 쓸려가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넘어지더라도 다시 운전대를 잡는 것은 전혀 다른 삶입니다. 저는 지금 시대의 여성들, 그리고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보다 주체적 삶의 서사(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자기 결정권 중심의 관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자기 결정권이란 타인이나 외부 환경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중심적 선택자가 된다는 개념으로, 현대 심리학에서도 내적 동기와 정신 건강의 핵심 요소로 꼽힙니다.

홍심이 살던 조선 시대와 달리 지금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훨씬 넓어졌고, 그 선택의 범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봅니다.

정서적 자기 효능감(자신이 어려운 상황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믿음)에 관한 연구에서도 삶의 통제감을 높게 지각하는 사람일수록 심리적 안녕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여기서 심리적 안녕감이란 단순히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 삶의 의미와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는 내면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드라마가 초반의 아기자기한 로맨스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무거운 사극 장르로 전환되면서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 아기자기한 매력이 사라지면서 드라마의 색깔이 흐려진 느낌이 들긴 했지만 무연의 희생 서사와 홍심의 대사는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제가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든 부분이었습니다.

드라마 한 편을 다 보고 나서 결국 남는 것은 이 두 가지였습니다. 처음 놓인 자리가 어디든 다시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파도에 쓸리더라도 결국 운전대를 잡는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VZ_QTc8a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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