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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노트1 (공감, 용기 낼 용기, 잘못된 모성애)

by eunhaji 2026. 5. 4.

 

복수를 해야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신 적 있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 속 복수 장면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통쾌하다"가 아니라 "그래서 뭐가 달라졌을까"였습니다. 드라마 복수노트는 억울한 일을 당한 주인공 구희가 이름을 적으면 자연스럽게 응징이 이뤄지는 노트를 통해 학교 내 부조리를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에 대한 통쾌함을 주려고 먼저 시청했다가 공감과 용기, 그리고 부모의 역할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는 내내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구희의 공감

구희의 행동을 두고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그 오지랖이 어디서 오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희는 자신도 입학 첫날부터 교통카드 잔액 부족, 중학교 교복 착용 실수, 남자친구에게 버림받는 굴욕까지 연이어 겪습니다. 누군가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이는 건, 본인도 그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는 능력을 심리학에서는 정서적 공감(Affective Empathy)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서적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단순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도 그 감정을 함께 느끼는 반응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저 사람 힘들겠다"를 넘어 "저 기분 나도 알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건축업을 하는 아빠를 한번 도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자여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이 힘들게 공사현장에서 자재를 나르는 모습을 보고 그분들의 노고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어르신들이 리어카를 끄시는 것을 보게 될 때마다 뒤에서 밀어드리거나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시면 가시는 곳까지 들어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구희는 오지랖이 넓은 것이 아니라 공감능력이 뛰어난 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구희가 허미나를 위해 복수노트를 사용한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허미나는 음악 선생님과의 관계를 부풀리고, 급기야 임신까지 주장하며 선을 넘습니다. 보통이라면 "저 아이는 거짓말쟁이야"로 끝낼 상황입니다. 그런데 구희는 허미나를 벌주려는 게 아니라 거짓의 굴레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노트를 씁니다. 나쁜 행동의 결과를 응징하기보다 그 행동의 원인을 끊으려 한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이 드라마가 단순한 복수물과 다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용기 낼 용기

복수노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압니다. 작가는 복수노트앱을 통해서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힘과 연대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앱을 통해 복수하지만 점차 앱에만 의존하지 않고 구희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본인이 움직이고 증거를 모으고 목소리를 냈을 때 상황도 바뀝니다. 좀비파 사건도, 이중 선생님 사건도, 유라 엄마의 갑질 사건도 결국 구희와 친구들이 발로 뛰어 모은 블랙박스 영상, 촬영 영상, 해명글이 핵심이었습니다. 노트는 결심을 상징할 뿐, 변화를 만들어 낸 건 용기였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복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스스로 뉘우치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은 성장해 가는 과정이라 반성하는 과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강제적인 응징보다, 잘못을 알고 사과할 줄 아는 성숙함을 기르기 위한 과정을 가해자 한두 명이라도 보여주었더라면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가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경계선을 만드는 연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구희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라 어른들이 더 세심하게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모성애

드라마에서 가장 불편하게 봤던 인물은 유라도, 가은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어른인 유라의 엄마였습니다. 운전기사에게 온갖 언어적 폭력을 가하고, 학교까지 찾아와 권력으로 상황을 뒤집으려 하고, 딸이 잘못해도 무조건 감싸는 그 모습이 유라의 행동과 정확히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사회학습이론(Social Learning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사회학습이론이란 인간이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하며 학습한다는 개념으로,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가 제시한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아이는 부모가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부모가 직접 보여주는 행동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유라가 지운에게 함부로 대하고, 구희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행동은 결국 엄마에게서 학습된 패턴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어른이라고 다 성숙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모라면 타인의 아이까지 소중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비뚤어진 모성애, 감정적인 미성숙이 유라를 이기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제가 아이들 앞에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신경 쓰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권력 앞에서 우쭐대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그게 자연스러운 어른의 태도라고 받아들입니다. 유라 엄마가 갑질 논란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게 된 장면은 드라마적 결말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부모의 일상이 곧 자녀 교육"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 문제를 틀렸을 때 질책하기보다 왜 틀렸는지 함께 살펴보는 태도,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연습, 이런 것들이 유라 같은 아이를 만들지 않는 실질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가정 내 훈육 방식이 자녀의 사회성과 공감 능력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도 이를 뒷받침합니다(출처: 한국아동학회).

복수노트는 결국 "억울함을 혼자 삭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변화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복수노트가 없어도 구희처럼 공감하고, 용기를 내고, 올바른 기준을 보여주는 어른이 곁에 있다면 아이들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한번 다졌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oLyvqC69Mg&t=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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