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부설 교육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2년이 기억납니다. 드라마 블랙독을 보면서 기간제 교사들이 겪는 다양한 감정들을 보며 불안한 고용 속에서 일했던 제가 느낀 감정과 같았습니다. 기간제 교사 고하늘이 강남 사립고에서 버텨나가는 이야기는 계약직이라는 이름표 하나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착각
실력을 증명하면 나를 놓지 못할 거라는 착각.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주말에도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무기계약직 전환, 즉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계약 기간 없이 고용이 유지되는 형태로의 전환이 가능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무기계약직이란 기간제 근로자가 2년 이상 근무할 경우 기간 정함 없는 근로계약이 자동 전환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조직은 제 기대를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계약 조건은 2년이었고 예외는 없었습니다.
고하늘도 똑같은 벽에 부딪힙니다. 수업 자료를 밤새 만들고, 진학부 입시 설명회를 뒤집어엎을 각오로 준비하고, 심화반 이카로스 지도교사까지 맡았지만, 정교사 채용 최종 결과는 "합격자 없음"이었습니다. 이때 적용된 기준이 바로 교원 임용 절차입니다. 여기서 교원 임용이란 필기시험, 시범 강의, 심층 면접을 거쳐 학교가 정교사를 선발하는 공식 채용 과정을 말합니다. 하늘은 필기 1등이었지만, 조직 내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결국 채용 자체가 무산됩니다.
2025년 기준 국내 비정규직 근로자 수는 약 856만 8천 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38.2%에 달합니다(출처: 통계청). 이 수치는 고하늘의 이야기가 드라마 속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대한민국 직장인 셋 중 하나가 살고 있는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실력 한 잔, 공감 한 스푼
제 고등학교 시절에도 고하늘 같은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야자 시간, 공부에 지쳐 멍하니 앉아 있던 저에게 채찍질 대신 시원한 물 한잔 건네주신 분이었습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은 누구든 할 수 있지만,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읽으려 애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 선생님 덕분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우리 반 아이들 모두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졸업했습니다.
블랙독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저는 지금 직장에서 어떤 사람인가. 제가 생각하는 저는 도현우 교사 쪽에 더 가깝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결과물 중심으로 판단하며, 결정적 순간에 실질적 도움을 줍니다. 논리적으로 할 말은 합니다. 하지만 박성순 교사가 가진 것, "이 선배 밑에 있으면 내가 보호받고 성장할 수 있다"는 느낌을 후배들에게 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순이 하늘에게 보여준 것은 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라 진짜 멘토링이었습니다. 저는 실력이라는 원칙 위에 공감이라는 보호막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고용형태와 무관하게 어떤 사람으로 일하느냐는 결국 본인의 선택입니다. 계약직이라는 조건이 그 선택을 막지는 않습니다. 제가 2년 동안 학생들의 학위 취득을 지원하는 일이 재미있었고 보람이 있었던 건, 계약서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헌신의 무게
속상했던 장면도 있었습니다. 지해원 교사가 대치고 정교사 후보에서 탈락하는 장면은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깊이 숨이 막혔던 부분입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그 노력이 결국 인정받지 못하는 결말이었습니다. 2년 계약직으로 일한 제가 그 2년의 무게를 알겠는데, 6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감히 상상도 못 합니다.
이 장면이 불편했던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입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학법(사립학교법)상 사립학교의 교원 채용은 학교 재단이 상당한 재량권을 갖고 있어, 공개 채용 원칙이 있음에도 현실에서는 불투명한 과정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학법이란 사립학교의 설립, 운영, 교원 임용 등을 규율하는 법률로, 공립학교와 달리 교육청이 아닌 학교 재단이 교원 채용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허용합니다. 2024년 교육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사립학교 기간제 교사 중 정교사로 전환되는 비율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모든 기간제 교사를 정교사로 채용할 수는 없다는 현실은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학교를 위해 가장 오래, 가장 많이 헌신한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그 노력에 응당한 기회를 주는 결말이었다면 세상의 모든 계약직 근로자들이 조금 더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지해원이 결국 다른 사립학교에서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줬지만, 아쉬움은 남습니다.
블랙독 드라마는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기간제든 정교사든, 일하는 사람의 가치는 고용 형태가 아니라 그가 매일 어떤 태도로 자리를 지키느냐에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불안이 커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행동으로 옮기던 제2년이 떠올랐고, 그 시간도 지금 이 자리를 만든 소중한 경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계약직이라는 조건이 당신의 가능성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느냐가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