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
드라마 <사내맞선>은 지친 일상 속에서 아무런 부담 없이 유쾌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참 고마운 작품입니다. 재벌 3세 사장님과 평범한 직원의 로맨스라는 설정은 사실 우리가 익히 봐왔던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유독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뻔한 클리셰를 당당하고 유쾌하게 비틀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주인공 신하리가 보여준 당차고 씩씩한 모습은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대역으로 나간 맞선 자리에서 어떻게든 차이려고 엉뚱한 연기를 하는 모습은 신선한 재미를 주었고, 직장인으로서 자기 일에 열정을 다하는 모습은 깊은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무결점의 강태무 사장이라는 캐릭터 역시 지친 일상에 달콤한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자극적이고 어두운 뉴스나 사건 사고가 넘쳐나는 요즘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적어도 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만큼은 마음 편히 설레고 행복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찬사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완벽한 남주인공의 조건이나, 집안의 반대라는 전형적인 갈등 구조가 조금은 식상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현실의 결혼과 연애는 드라마처럼 명쾌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문득 TV를 끄고 고개를 돌려보면 내 앞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치열한 진짜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정한 남편도 회사일이 고되면 퇴근하고 돌아와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고 한창 에너지가 넘쳐나서 뒤돌아서면 투닥거리는 우리 두 아이를 보면 가끔은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태무처럼 근사한 이벤트를 해주거나 하리처럼 매 순간 상큼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삶은 아니지만, 이 안에는 드라마가 주지 못하는 묵직한 행복이 존재합니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장으로서의 든든함이 있습니다. 드라마의 화려한 사랑 고백보다, 늦은 밤 슬그머니 제 어깨를 주물러주는 남편의 투박한 손길에서 저는 더 큰 사랑을 느낍니다. 또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며 품에 안겨 오는 두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직장 생활에서 쌓인 모든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최고의 비타민이 되어줍니다.
내가 강태무
만약 제가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대기업의 사장, 강태무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제가 태무였다면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맞선 자리에 매번 등 떠밀려 나가기보다, 애초에 제 삶의 주도권을 쥐고 조금 더 차분하게 소통했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 속 태무는 일에만 중독되어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맞선에 나갔지만, 저라면 할아버지께 제 진심과 인생의 계획을 명확히 설명해 드리고 불필요한 맞선 소동을 미연에 방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하리가 거짓말로 신분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드라마처럼 짓궂은 복수극을 펼치며 하리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리의 입장에서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두려움과 절박함이 있었을 텐데, 사장의 권력을 이용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모습은 조금 치사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짜 태무였다면, 하리의 거짓말 이면에 숨겨진 사정과 친구를 도우려 했던 따뜻한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보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하리의 정체를 안 직후, 감정의 밀당을 하기보다는 담백하게 자리를 마련해 먼저 이야기를 청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차분하게 귀를 기울이고, 회사 직원으로서의 하리가 가진 뛰어난 능력과 인간적인 매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 감정적인 소모전보다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포용하는 넓은 도량이 훨씬 중요하더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도 신분이나 조건의 격차에 흔들리기보다, 상대를 향한 내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주변을 설득하는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드라마 속 태무의 츤데레 같은 복수와 틱틱거림이 극의 재미를 더해준 신의 한 수였음은 인정하지만, 제 성격대로라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묵직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배려하면서 직진하는 사랑을 택했을 것입니다. 화려한 외제 차나 멋진 리조트보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진짜 어른의 멋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가 신하리
만약 제가 신하리가 되어 제 성격대로 드라마를 다시 각색해 본다면, 저는 처음부터 거짓 맞선 대역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입니다. 제 성격상 아무리 친한 친구의 간곡한 부탁이라 할지라도, 타인을 속이는 기만행위나 직장 생활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함과 신뢰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저로서는,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낳는 아슬아슬한 상황 자체가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에게는 다른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설득하고, 제 본업인 식품 연구원으로서의 삶에 더욱 집중하는 방향으로 극을 이끌어갔을 것입니다.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사장님과 엮이게 되더라도, 정체가 탄로 나기 전에 먼저 사장실 문을 두드리고 제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변명하지 않고 제 실수를 인정하며, 회사에 끼친 누를 보상하겠다는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제 성격에 맞습니다. 이후의 로맨스 전개 역시 조금 더 담백하고 현실적으로 각색하고 싶습니다. 재벌 사장과의 신데렐라 같은 로맨스에 허황된 꿈을 꾸기보다는, 제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당당한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성장 서사를 훨씬 크게 부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평범한 우리들의 회사 생활도 드라마처럼 역동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서류 작업, 소소한 의견 충돌, 그리고 마감 기한을 맞추기 위한 숨 가쁜 일정들이 연속되는 소박한 일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드라마 속 하리가 자신이 개발한 식품이 출시되었을 때 느꼈던 그 순수한 보람과 열정만큼은 저 역시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맡은 업무를 책임감 있게 완수해 내고, 동료들과 협력하여 작은 성과를 이루어냈을 때의 그 뿌듯함은 삶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됩니다.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도 눈물짓기보다, 제가 개발한 훌륭한 업무 성과를 당당히 보여드리며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을 것입니다. 스스로 멋진 구두를 사 신고 당당하게 파트너와 나란히 걷는, 조금 더 주체적이고 단단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로 드라마를 새롭게 채워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