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세 의대반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의대 준비반에 들어가기 위해 아주 어릴 때부터 선별되는 곳이라 합니다. 처음에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7세 때 선행이라는 단어보다는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나이라서 적어도 저는 놀이터에서 뛰어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선의의 경쟁'을 보고 나서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방에서 전교 1등 하던 우슬기가 강남 명문고 세화여고에 전학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화면 속 풍경이 너무 익숙하면서도 불편했습니다. 사교육 없이는 시작도 못 한다는 그 분위기가 현실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7세 의대반에 속해 있는 친구들이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교육 - 사교육과 공교육
드라마 속 슬기는 이전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지만 강남에 오자마자 낯선 벽에 부딪힙니다. 배운 적도 없는 범위에서 시험이 나오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미 학원과 과외로 선행학습을 마친 아이들에게는 그냥 복습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슬기만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그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안타까움이, 누군가에게는 사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알게 해 주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저도 아이 둘을 키우면서 영어, 수학, 예체능 학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들이 학원에 가지 않으면 공부에 뒤처질까 봐 불안한 마음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 불안이 매달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교육비를 지출하게 만들었고,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선행학습이란 현재 학년보다 앞선 내용을 미리 공부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동 발달 전문가들은 과도한 선행학습이 학습 동기 저하와 번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실제로 학원에서 선행을 마친 아이들이 학교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은 꽤 흔하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학원은 꼭 필요한 걸까요? 학원이 실력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부모와 학생의 불안을 해소시키는 심리적 장치로 기능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교육만으로도 스스로 잘 끌어가는 학생들이 있을 텐데 사교육 없이 대학진학이 어렵다는 인식을 주기 모습이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EBS 무료강의로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고, 자기주도학습이 잘 잡혀있는 아이들은 학원 없이도 충분히 좋은 성과를 냅니다.
내 안에 있는 재이아빠
재이의 아버지 유태준은 딸의 성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수능 킬러 문항을 빼돌리고, 딸의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도 "이게 다 너를 위해서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될 거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대사에서 입을 막았습니다. 제가 아이한테 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부모들이 저와 같은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둘째가 수학에 재능을 보이는 걸 발견하고 나서, 저도 모르게 문제집을 추가로 사고 제 통제 하에 선행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는 좋은 엄마, 아이를 잘 이해하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제 욕심을 아이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 불편한 자기반성이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부모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취 욕구를 자녀에게 전가하는 심리적 기제로, 의식하지 못한 채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그 무게에 짓눌리게 됩니다. 실제로 국내 청소년 정신건강 연구에 따르면 학업 스트레스는 청소년 우울감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재이가 갑옷을 입은 장면이 나오는데 평범했던 아이가 단단한 갑옷을 입은 상징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갑옷은 1등이라는 무거운 굴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입고 있는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무겁고 불편합니다. 재이는 아빠의 완벽한 딸이 되기 위해 강요된 삶을 살아온 표현처럼 느껴졌습니다. 재이의 소리 없는 비명이 보이는 것 같고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한다고 믿는 행동이 아이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수고했어, 오늘도
드라마에서 슬기가 인상적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교육 없이 자기만의 공부 방법으로 전교 1등을 해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약을 먹으며 잠을 줄이고 공부하는 드라마적 설정이 있었지만, 이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공부의 본질은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19세 이상이 아닌 많은 학생들이 보고 공감하고 배울 수 있도록 자극적인 요소보다는 정말 제목 그대로 선의의 경쟁을 중고등 학생들이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기가 공교육만으로 어떤 루틴과 학습 패턴을 유지했는지 드라마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줬더라면 많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이 잘 정착된 모습,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을 함께 담아줬다면 아이들과 같이 보자고 추천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자기주도학습이란 학생 스스로 학습 목표를 세우고 방법을 선택하여 결과를 점검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교사나 부모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과 달리, 아이가 학습 과정의 주체가 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주도학습 역량이 높은 학생은 단기 성적뿐 아니라 대학 이후 삶에서도 더 높은 성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7세 의대반이라는 현실이 이미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미취학 아동의 뇌는 아직 추상적 사고를 처리하기 어려운 단계인데, 과도한 학습은 오히려 정서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이 많습니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인생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방식은 결국 아이도, 부모도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 길임을 이 드라마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증명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다른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는 말을, 저는 췌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봤을 때 몸으로 알게 됐습니다. 엄청난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이러다 잘못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민했던 직장의 문제도 아이들의 성적문제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실 문제없는 고민들로 힘들어하지 않은가 되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아이의 건강과 정서를 갉아먹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오늘 아이에게 "몇 점이야?라는 말보다는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말로 반겨주려 합니다. 우리 가족이 무사히 집에 돌아와 평안히 쉴 수 있다는 평범한 일상에 감사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입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건강하게 버텨낼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이 결국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jIYydXgMR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