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시절
요즘 날씨도 싱숭생숭하고 마음이 헛헛할 때, 제 눈길을 사로잡은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올해 초에 방영했던 <언더커버 미쓰홍>이라는 작품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의 여의도 증권가를 배경으로 삼았는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 시절의 공기와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져 와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서른다섯의 똑똑한 증권감독관 홍금보가 스무 살 말단 사원 ‘미쓰홍’으로 변장해 위장 취업을 한다는 설정이 참 기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눈물겨웠습니다. 커피 심부름에 복사기 다루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제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파릇파릇하고도 어설펐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빙그레 웃기도 하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참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온 세월입니다. 지금은 한 가정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직장인으로 매일을 버텨내고 있지만 제게도 그 시절 미쓰홍처럼 주눅 들고 눈치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가벼운 코미디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담겨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물론 현실성이 조금 떨어지는 극적인 설정이나 우연이 겹치는 부분은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시선만큼은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가사와 고된 직장생활 속에서, 이 드라마는 제게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아련한 추억을 선물해 준 고마운 친구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홍금보가 되지 못하는 나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몰입했던 부분은 '만약 내가 홍금보였다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절대로 그렇게 못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워낙 천성이 조심스럽고 걱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혹시 내가 오늘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는 평범한 사람인데, 남의 이름을 빌려 나이까지 스무 살로 속이고 위장 취업을 한다니 상상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밤에 잠도 못 잤을 게 뻔합니다. 게다가 직장 상사로 부임한 사람이 하필이면 옛 연인이라니, 저 같으면 첫날 출근하자마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도망쳤거나, 사표를 던지고 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속 홍금보의 대담하고 당찬 모습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무척 부러웠습니다. 나이를 스무 살이나 낮춰서 막내 노릇을 하느라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도, 자신의 본래 목표인 비자금 조사를 위해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현실의 우리는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거나 억울한 상황에 처해도, 그저 가정을 위해, 혹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꾹 참고 삼켜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속으로는 시원하게 사표를 던지는 상상을 하지만 결국은 허허 웃으며 넘기고 마는 우리네 모습에 비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정면으로 부딪히는 주인공의 모습은 대리 만족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비록 저처럼 소심한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허구의 설정이지만, 그 무모할 정도의 용기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소중한 일상
극 중반 이후 IMF 위기가 닥치면서 주인공과 동료들이 구조조정의 위기에 직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치열한 생존 싸움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제 일터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습니다. 지금 제가 몸담고 있는 직장도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다 보니, 경기가 어렵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남일 같지 않아 가슴이 철렁하곤 합니다. 그래도 퇴근길에 무거운 어깨를 이끌고 집에 들어서면, 저를 반겨주는 가족들이 있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다정다감하게 집안일을 도와주려 애쓰는 남편, 그리고 아직은 세상모르고 맑게 웃는 초등학생 두 아이의 재잘거림을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집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서로 연대하며 위기를 버텨냈듯이, 저를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은 역시 가족이라는 울타리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더 단단한 부모가 되어야지', '직장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어야지’하고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언더커버 미쓰홍>은 비록 90년대의 이야기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 참 닮아 있습니다. 비바람이 불어오는 거친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건,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따뜻한 밥상과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작은 마음들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제 곁에 있는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소소한 직장생활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참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