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 아이가 언니 따라 립밤을 사달라고 떼를 쓰던 날, 문득 드라마 여신강림의 주인공 임주경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인데 이미 입술 색에 신경을 쓰다니, 세상이 참 빠르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해도 되는 것이 저도 학생 때는 얼굴에 파우더를 바르고 다니곤 했었습니다. 하얀 얼굴이 갖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생 때는 아니었지만 예뻐 보이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학생이 가장 예쁠 때는 화장할 때가 아니라 그 모습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존감으로 화장하기
한참 공부할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분식점에 자주 갔었습니다. 친구들 중 예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인성도 좋아 어른들에 이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랑 분식점에 가면 튀김 하나 서비스를 받기도 하고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인사까지 해주십니다. 저는 그 옆에서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주경이가 "못생겨서 싫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표정이 그냥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 쉽게 말해 외모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적 현상을 말합니다. 이 현상은 드라마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광범위하게 작동합니다. 후광 효과(Halo Effect)란 한 가지 긍정적인 특성이 다른 특성에 대한 평가까지 끌어올리는 인지 편향을 말하는데, 외모가 좋으면 능력이나 인성까지 좋게 보이는 이 현상이 취업 면접이나 서비스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주경이가 화장을 통해 달라진 시선을 경험하며 "이 가면을 절대 벗으면 안 되겠다"라고 느낀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주경이의 변신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화장이 자존감을 만들어 준 걸까요, 아니면 자존감이 있어야 화장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걸까요? 드라마 안에서 주경이가 진짜 달라지는 장면은 새 학교에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수호가 "네가 어떤 모습이든 항상 임주경 너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리고 엄마 현숙이 성형 견적을 받으러 갔다가 "멀쩡한 얼굴에 왜 칼을 대?"라고 돌아서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존감(Self-esteem)이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말하는데, 외부 시선이 아닌 내면에서 비롯될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주경이가 결국 생얼로 당당하게 학교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화장 기술이 늘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주변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경이에게 필요했던 건 더 뛰어난 화장 스킬이 아니라, 고운이를 도와주고 서준에게 솔직해지고 수호에게 마음을 여는 그 과정이었던 겁니다. 자존감으로 화장한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이번에 제가 드라마를 보고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말입니다. 저 역시 외모가 예쁜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은 제 인성을 먼저 알아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어떤 칭찬보다도 오래 남습니다. 하지만 역시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기는 합니다.
임주경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몇 번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주경이가 비밀이 들킬까 봐 거짓말을 하고, 도망치고, 울고, 또 오해를 만드는 장면들이 반복될 때 피로감이 밀려왔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SNS 환경에서 자라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에 훨씬 익숙한데, 이런 주인공 캐릭터가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는 심리학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방어기제란 불안이나 심리적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전략을 말합니다. 어릴 때부터 외모로 상처를 반복해서 받은 사람이 그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주경이의 과도한 눈치와 회피 행동은 현실적으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갈 수 있는 트라우마 반응입니다.
드라마적 재미와 공감 사이의 균형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정면돌파하거나 실수해도 다시 일어서는 에너지를 주는 캐릭터가 요즘 시청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마냥 약하거나 마냥 착하기만 하면, 이야기의 긴장감도 반감됩니다. 제가 느낀 피로감을 다른 분들도 느끼셨다면, 그것은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라 캐릭터 설계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남긴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화장은 도구이지 정답이 아니고,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진짜 자산이라는 것. 저도 아이들에게 립밤보다 먼저 가르치고 싶은 게 바로 이것입니다. 입술을 예쁘게 칠하는 것보다 인사를 잘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랍니다. 드라마 여신강림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물음을 던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강수진이라면
강수진은 보통의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담아낸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교묘하게 악역을 만드는 것보다 역대급 걸크러시 캐릭터로 만들어 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압박 속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질투와 악행으로 표출하기보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 쪽으로 눈길을 돌려 정서적 안정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수호에 대한 마음도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비겁한 짓을 하기보다는 나를 더 알아봐 주는 다른 남자를 찾아보면 됩니다. 주혜민이나 임주경을 괴롭히는 박새미 무리들을 대할 때에도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제압하며 혜민이와 주경이의 불안한 감정을 따듯하게 보듬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멋진 친구로 보인다면 여신강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특히 주경이의 답답한 고구마 같은 행동들에 수진이가 현실적인 조언으로 중심으로 잡아준다면 주경이의 자존감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을 것이고, 시청자로서 느낀 답답함도 수진이로 인해 빠르게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수진이로 나왔다면 자존감 낮은 임주경이는 강수진을 만나 가면을 벗고 진짜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성장드라마로서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한 서사로 나올 수 있는 여신강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저만의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