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열혈사제를 보고 제 직장생활이 조금은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합리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그냥 참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생각했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열혈사제를 보면서 그 오랜 침묵이 얼마나 정의롭지 못했는지 스스로 창피함이 몰려왔습니다. 시청률 21%를 기록한 이 드라마가 왜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는지 이해가 되며 저 또한 김해일선부처럼 앞으로는 정의롭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김해일 신부와 같은 신입직원
제가 직장에서 겪은 일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평가인증을 앞두고 팀 전체가 야근을 하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은 우리 몰래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1년 차 신입이 보고 말았고, 결국 참다못한 그 신입이 팀장님에게 정면으로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부당함을 따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팀원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 것 같이 속이 다 시원하였습니다.
열혈사제의 김해일 신부가 바로 그 신입 같은 존재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그는 강자에게는 회개의 주먹을, 약자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과 감정 해방을 느끼게 해 주며 정의가 이긴다는 옳은 길을 보여줍니다. 연구에 따르면 직장 내 부당한 처우를 경험한 근로자 중 65% 이상이 소극적 침묵으로 대응한다고 합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저도 그 65%에 속했고, 드라마는 그 답답함을 대신 풀어준 셈이었습니다.
그 신입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됐을지 짐작이 갔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호하지 못했고, 그 점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습니다.
내부고발(whistleblowing)이란 조직 내부의 비리나 부당한 행위를 외부에 알리거나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열혈사제에서도 이 구조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성당 총무부장이 거짓 증언을 하고, CCTV 영상이 조직적으로 삭제되고, 영준 신부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는 과정을 보면서 내부 폭로가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드라마 속 김해일은 혼자가 아닙니다. 형사 구대영, 검사 박경선, 수녀 인경이 각자의 방식으로 한 방향을 향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 직장에서 신입 혼자 소리쳤을 때 우리 중 누구도 그 자리에서 함께 나서지 않았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가 여기서 나옵니다. 물론 모든 직장 내 분위기가 이렇지는 않지만 보수적인 직장은 퇴사조차 조용히 나가는 것이 대다수 일 것입니다.
내부고발자 보호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2011년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출처: 국민권익위원회). 쉽게 말해 공익적 목적으로 조직의 부당행위를 신고한 사람을 불이익으로부터 보호하는 법 제도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보호망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경선이 정의를 택한 이유
박경선 검사를 보면서 솔직히 저는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녀는 완전한 악인도 아니고 처음부터 정의로운 인물도 아닙니다. 팀장에게 잘 보이려고 간식을 바쳤던 저처럼, 그녀도 재벌 회장 아들의 사건을 덮으며 자신의 출세를 우선시했습니다. 이득과 양심 사이에서 이득을 선택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박경선은 조직의 권력에 동조했었지만 김해일 신부와 만나면서 결국 정의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립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이 드라마가 던지는 가장 현실적인 메시지입니다. 완전한 영웅이 아닌 사람들이 조금씩 옳은 선택을 해나가는 과정이 결국 집단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열혈사제에서 변화는 김해일 혼자가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의 작은 선택들이 겹치면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팀장의 잘못된 행동을 묵인했던 것과 신입 혼자 소리를 지르도록 내버려 뒀던 것들이 저도 박경선처럼 변화되어 충분히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저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같은 마음으로 해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정의: 폭력 없이 제도 안에서 싸울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김해일이 악당들을 주먹으로 응징할 때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계속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드라마가 시청률 21%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폭력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장면에 공감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 공감이 폭력 자체에 대한 찬성이 아니라 현실 제도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법의 울타리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사람들은 대리인을 원하게 되고 대리인을 통해 그들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정의롭지만 방법이 폭력이라면 괜찮은 것일까요? 결과가 좋으면 이러한 과정도 괜찮을지, 정의를 위해서라면 그 방법이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김해일신부의 방식은 통쾌하지만 정상적인 방식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이 드라마가 물어보는 질문 같았습니다.
드라마 안에서 김해일은 결국 교황에게 편지를 쓰고, 경선과 공조하고, 증거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폭력이 서사의 주된 도구처럼 보이지만, 사건 해결의 실질적인 열쇠는 언제나 증거와 연대였습니다.
다음에 직장에서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다면 저는 그때 신입처럼 혼자 소리치지 않는 방법을 먼저 고민하고 싶습니다. 제도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 주변 사람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열혈사제 시즌 2도 2024년에 종영되었습니다. 시즌1이 남긴 질문들에 시즌2가 어떤 답을 내놓는지, 이번에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시청자가 아니라 조금 다른 눈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즌2 감상문도 곧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