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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귀신님 (봉선, 불편한 재발견, 자생의 힘)

by eunhaji 2026. 5. 10.

 

산후조리원에서 처음 이 드라마를 봤을 때는 그냥 "귀엽고 가볍다"라고 흘려봤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역주행해서 다시 보니 나봉선이라는 캐릭터가 제 사회초년생 시절과 겹쳐 보여서 재미있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습니다.

봉선 그리고 순애

나봉선의 가장 큰 특징은 입에 달고 사는 "죄송합니다"입니다. 특별히 잘못하지 않았어도 늘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실력은 있는데 그걸 제대로 꺼내지 못합니다. 저도 사회초년생일 때 하루에 열 번은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미안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꽤 짠합니다.

봉선이는 주방에서의 순발력이나 요리 감각을 보면 분명 소질이 있는데, 본인이 그걸 믿지 않으니 계속 움츠러드는 것입니다. 그런 봉선이는 강선우 셰프에게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간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표정이 달라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혹독한 주방 환경 속에서도 팀원들이 서로 커버해 주고, 퇴근 후 으쌰으쌰 뭉치는 장면들이 이 드라마의 진짜 온도를 만들어냅니다. 저도 사회초년생일 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 중 한 명이 실수하면 다 같이 커버해 주는 의리 좋은 동료들 덕분에 버텼다는 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렇게 자존감 낮았던 봉선이 몸에 신순애가 들어오면 분위기가 180도 바뀝니다. 눈치를 보던 사람이 능글맞게 장난을 치고, 기죽지 않고 원하는 걸 직접적으로 요구합니다. 이 구조를 보면서 저도 예전에 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내 안의 누군가가 대리실행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PT 발표할 때 내 안에 발표의 신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이가 아플 때 소아과 의사가 되어버리고 싶다는 생각 등등 한 번쯤 해본 분들 많으실 겁니다. 드라마에서도 순애가 하는 행동들이 봉선이가 완전히 원하지 않는 것들이 아닙니다. 봉선이도 자신감 있게 살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순애는 그 욕망을 대신 실행해 줍니다. 그리고 봉선이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조금씩 자기 자신을 허락하게 됩니다. 사실 외부의 자극 없이도 봉선이는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본적인 요리 실력이 있고, 주방 식구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팀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잠재력이 분명합니다.

불편한 재발견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순애가 선우 셰프에게 스킨십을 요구하고, "한 번만요"를 반복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선우 세프의 반복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요구합니다. 박보영배우 특유한 귀여움과 코믹한 연출 덕분에 웃고 넘어가게 되지만, 만약 남성 캐릭터가 여성 캐릭터에게 같은 행동을 했다면 이야기와 장르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 시도나 지속적인 성적 언동은 직위 관계와 무관하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특히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라면 거절 자체가 부담스러운 구조이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게 다뤄야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순애로 빙의한 봉선이와 선우 셰프는 보조 직원과 주방 총책임자 관계입니다. 봉선이 입장에서 셰프의 요구를 거절하는 건 난감하고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은 성별과 관계없이 상대방이 원치 않는 언행이나 신체 접촉으로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곧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시점으로 이 드라마를 시청한다면 재미는 있을 수 있지만 자칫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부분들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사회적 흐름이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생의 힘

봉선이는 순애 없이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드라마가 순애라는 장치를 통해 변화를 보여주지만, 사실 봉선이에게는 이미 조건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봉선이가 순애 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 근거는 첫째, 주방에서 인정받는 실력이 이미 존재했습니다. 요리대회 3위 입상이 이를 증명합니다. 둘째, 겉으로는 티격태격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를 챙기는 주방 식구들이 있었습니다. 셋째, 강선우 셰프의 직접적인 트레이닝이라는 성장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넷째, 누룽지 북어국밥 같은 순발력 있는 아이디어들이 봉선이 본인에게서 나왔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자기 효능감 향상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연구에 따르면 칭찬과 인정, 소속감, 성공 경험이 반복될 때 자신감은 외부 충격 없이도 자연스럽게 회복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순애가 직접 몸을 빌려 보여주는 방식도 극적으로는 재미있지만, 봉선이가 팀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스스로 쌓아가는 성장이 더 건강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후반부 봉선이가 유학을 결심하고 "처음부터 천천히 차근차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제일 좋았습니다. 순애 덕분에 촉발된 변화가 아니라, 봉선이 본인이 선택한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10년 전에 봤을 때는 로맨스가 눈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봉선이의 성장 곡선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가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일 겁니다. 역주행할 때의 재미가 바로 이런 것 같습니다. 같은 장면인데 다른 것이 보입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라면 로맨스보다 봉선이라는 사람 자체에 집중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4itUcFlBp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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