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으신 게 1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병이 낫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버티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 그 안에서 차요한이라는 드라마 속 의사를 보며 처음으로 "언제 끝나느냐"가 아닌 다른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고통 완화
차요한은 진단명보다 고통을 먼저 봅니다. 파브리병 환자를 마주했을 때도, 선천성 무통각증 환자를 마주했을 때도, 그는 병명을 확정하기 전에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읽었습니다. 드라마 속 의사는 보통 빠른 진단과 드라마틱한 처치로 주목받는데, 그가 보여준 것은 완화의료였습니다.
완화의료(palliative care)란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자체의 치료와 별개로 환자의 고통과 삶의 질을 관리하는 의료 접근법입니다. 쉽게 말해 "병을 고치는 것"과 "아프지 않게 사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매년 약 4천만 명이 완화의료가 필요하지만 실제로 받는 비율은 14%에 불과합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제가 직접 겪어보니, 병원에서 치료 방향을 논의할 때 "완치 가능성"이 대화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어머니의 신약 처방 이후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온몸이 붓고 음식을 거부하시는 상황이 왔을 때도, 가족들이 받은 정보는 주로 약의 효능과 생존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생사 앞에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신지,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습니다.
차요한이 환자를 볼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맥박을 짚고 상태를 읽는 것입니다. 그 짧은 접촉 안에서 그는 이미 통증의 원인을 역추적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적 과장이 있더라도 그 태도만큼은 진짜라고 느꼈습니다. 완화의료에서 말하는 통증 사정(pain assessment)이란 환자가 느끼는 통증의 위치, 강도, 성격을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인데, 이것이 치료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가족으로서 절감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차요한은 말기 암 환자에게 "고통을 해결하다, 그러다 죽는다 할지라도 그게 전부야"라고 말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잠시 멈췄습니다. 시어머니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부작용 속에서도 어머니는 오늘도 식사를 하려 애쓰십니다. 그 모습 앞에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치료법 검색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게 드실 수 있는 음식을 찾는 일이라는 걸, 차요한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람, 의료진
차요한은 완벽한 의사가 아닙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무면허로 처치하고, 진단이 틀릴까 봐 흔들리고, 환자의 죽음 앞에서 무너집니다. 드라마 속 기석이를 살리지 못한 뒤 차요한이 보이는 반응은 영웅 서사가 아니라 번아웃 직전의 인간이었습니다.
이건 의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0년 넘게 투병 중인 가족 곁에 있다 보면, 보호자도 감정적으로 소진됩니다. 표정을 살피고, 음식을 조심하고, 컨디션 변화에 긴장하는 일이 쌓이면 어느 순간 내가 지쳐있다는 걸 인식조차 못 하게 됩니다. 의료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차요한처럼 환자 고통에 온전히 개입하는 의사라면 그 감정적 소모는 더욱 클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강시영은 차요한에게 묻습니다. "교수님은 후회하지 않으세요?" 차요한은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 달 넘게 환자 숨만 붙여놓고 고통을 줬던 자신을 혐오했다는 그 장면이 저는 오래 남았습니다. 살리려 했지만 고통을 준 것, 그게 의사에게 남기는 죄책감의 무게를 솔직하게 보여준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에서 강시영과 강미래는 자매로 나옵니다. 의사로서 아버지를 연명해야 하는 동생 미래의 입장, 언니 시영은 고통스러운 연명을 멈추고 편안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누가 옳은가를 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인간다운 마침표였기 때문에 동생 미래가 언니와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여기에 차요한은 "고통을 끝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환자를 위한 마지막 치료다."라고 얘기합니다. 연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들렸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차요한의 대답이 위로가 됩니다.
귀한 꿈
둘째아이가 의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아픈데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대단하다"라고 말할 때 저는 솔직히 걱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투병을 보고 자란 아이인지라, 의료 현장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곳인지를 압니다. 차요한처럼 환자의 고통을 진심으로 보려는 태도는 분명히 귀한 것이지만, 그 태도를 지키다 무너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도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의사가 되지 않아도 그 마음으로 사람을 도울 방법은 많다고 얘기했더니 아이는 할머니 치료해 드리기 위해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 마음을 오래 지킬 수 있게 곁에서 돕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차요한이 보여준 건 결국 하나였습니다. 의사도, 보호자도, 환자도 모두 고통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흔들림을 인정하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 시어머니의 투병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저도 "얼마나 더"가 아닌 "지금 어떻게"를 더 자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드실 수 있는 것, 오늘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쉬실 수 있는 방법.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드라마 감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투병 중이거나 완화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담당 의료진과 충분히 상담하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