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이라는 나이는 무언가 이뤄놓았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불안함이 공존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마는 바로 그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보증금도 없고 신용등급도 5등급인 프리랜서 작가가 집주인과 계약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여자주인공 지호를 보면서 예전의 내 저의 모습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희망 고문
윤지호가 보조작가로 일하며 겪는 장면들이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전에 저는 교육기관에서 계약직으로 2년을 일하던 시절, 부장님과 과장님이 제 일 처리 방식을 꽤 인정해 주셨습니다. 학과장에게 연구직 전환을 건의해 주겠다고 했고, 저는 그 말을 믿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무기계약직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대가 쌓이면서 저는 제 몸을 갈아 넣었습니다. 결과는 불가였고, 학과장은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고, 부장님은 제 열심을 이용했을 뿐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배신감, 허탈함 등 다양한 감정이 쏟아졌지만 참아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헛된 순간들이 아니며 잘해왔음을 저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지호도 조감독에게 좋지 않은 일을 겪은 뒤 사과보다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주변사람들도 참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세계가 권력관계와 부당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낀 후 스스로 현장을 떠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부당함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자신을 지키려 한 행동이 멋져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변화하는 세희
드라마의 감정 서사를 지탱하는 핵심은 두 주인공의 심리적 구조입니다. 지호는 타인의 기대를 배신당한 경험으로 인해 마음을 닫은 상태였고, 세희는 과거 사랑의 실패로 회피형 애착(avoidant attachment)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회피형 애착은 친밀한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심리 패턴으로, 주로 과거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형성됩니다. 세희가 "인생에서 이 집과 고양이, 그리고 저 자신만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건 차가움이 아니라 자기 보호였습니다. 제 경험상, 원칙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 뒤에는 거의 항상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서서히 동화되며 변화하는 과정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세희가 지호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쉽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겠다며 연락을 끊고 몽골로 훌쩍 떠나버리는 장면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상당히 이기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자체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상대에게 아무런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단절하는 것은 자기 방식대로만 관계를 다루는 태도입니다. 상대방도 같은 불안과 기다림 속에 있다는 걸 세희가 조금은 더 고려했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진정한 소통은 내 마음의 혼란만큼이나 상대방이 겪을 불안과 기다림의 무게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내 감정이 소중하듯이 타인의 감정도 소중합니다.
반려의 존재
드라마에서 고양이는 반려동물 이상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드는 연결 고리이고, 세희에게는 유일하게 허락된 감정의 통로입니다. 지호가 고양이를 세심하게 돌보는 모습을 보고 세희에게 신뢰를 형성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반려동물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곧 사춘기라는 파도가 슬며시 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상보다 빨리 온 것 같아서 저와 남편이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들이는 것이 도움이 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적이나 행동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반겨주며, 사춘기 아이에게 감정의 대피소 역할을 해주는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 것 같아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동물매개치료(animal-assisted therapy)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동물매개치료란 훈련된 동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사회적 기능을 향상하는 치료적 접근법을 말합니다. 임상에서도 불안장애나 우울증 개선에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들이 나와 있습니다(출처: 한국동물매개심리치료학회). 실제로 국내 반려동물 양육 가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2025년 기준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 비율은 약 29.2%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출처: 농림축산식품부). 이 수치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반려동물이 현대인의 정서적 필요를 실질적으로 채워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고양이가 두 사람의 경직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기여한 것처럼, 실제로도 반려동물은 가족 구성원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합니다. 대화하기 어색한 순간에 "고양이 밥 줬어?" 한 마디가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드라마 제목처럼 이번 생은 처음이라 우리는 서툴고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철옹성 같던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의 세희처럼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용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계약결혼이라는 차가운 형식 안에서 진짜 온기를 찾아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많은 분들도 이번 생을 충분히 가치 있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