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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님은 9등급 (부조리, 손은빈, 시선)

by eunhaji 2026. 6. 2.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비리들 앞에 눈을 감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원래 다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모두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드라마 한 편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질문 하나를 다시 꺼내 놓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정말 순진한 일인가, 아니면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감각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만든 부조리

드라마 <이사장님은 9등급>의 주인공 나이수는 삐딱한 금수저 고등학생입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명문 사학 발해고등학교의 이사장 자리를 상속받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상속 조건은 이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발해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나이수는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 학교를 망가뜨리겠다는 일념으로 전학생 신분으로 등교합니다. 그런데 정작 학교를 망가뜨리려 하면 할수록, 진짜로 망가뜨리고 있었던 건 어른들이었습니다. 교사 유 선생은 나준 회장의 지시로 모범생 한바의 시험에 수면제 성분이 든 페퍼민트 차를 건네 의도적으로 성적을 무너뜨렸습니다. 여기서 페퍼민트 차를 이용한 수면 방해는 일종의 도핑(doping) 역공작, 즉 경쟁자의 수행 능력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키는 부정행위에 해당합니다. 스포츠에서 쓰이는 도핑이란 용어는 본래 경기력 향상 약물 사용을 뜻하지만, 반대로 타인의 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약물 사용도 같은 맥락의 반칙입니다. 고등학생이 이사장이 된다는 설정에 1차 당황스러웠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의도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2차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가능한 일들이 아님을 감안하고 드라마를 끝까지 시청하였습니다.

나준 회장은 발해고의 이사장 자리를 탈취하기 위해 재단 비자금을 조성하고 교장과 결탁했습니다. 비자금이란 공식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비공개 자금을 말하며, 기업이나 기관의 재무 투명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학교 운영진이 가장 앞장서서 교육의 공정성과 신뢰를 갉아먹고 있었던 셈입니다.

솔직히 이 장면들을 보면서 뜨끔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도 눈에 보이는 비효율이나 불합리를 보고도 "내 일 아니면 됐지"라고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조직 내 묵인 문화, 이것이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적 문제의 시작이라는 걸 나이수가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손은빈이라면

드라마 속 은빈이는 무시와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을 매일같이 견딥니다. 그러다 극단적인 선택 앞에 편견 없는 눈과 뚝심 있는 나이수를 만나고 여러 가지 감정들을 겪으며 조금씩 자신감도 찾고 변화해 가는 인물입니다. 제가 만약 손은빈이었다면 나이수 덕분에 단단해진 마음을 가지고 괴롭히던 친구들에게 정신적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렸을 것입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다루기보다는 멋지게 성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잘 이겨내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괴롭히는 친구들이 깎아내려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고 그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덤덤하게 대하며 폭력의 수위가 크다면 어른들의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 주면 사람은 단단해지기 마련입니다. 은빈이한테 나이수가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용기를 얻고 자기 스스로를 더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특히 가해자들의 압박 속에 드라마 은빈이는 거짓말로 한바탕에게 폭력을 뒤집어 씌우지만 저라면 가해자들이 행한 행동들, 언어들 죄다 녹음하여 학폭을 열어 그들을 응징할 것 같습니다. 저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폭력, 왕따 이런 문화에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 제각각이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라며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이 서로가 즐겁게 보내는 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선

직장과 학교는 구조가 다릅니다. 나이수는 이사장이라는 권한을 바탕으로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리고, 문제를 직접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직장인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오너의 목표에 맞춰 방향을 정렬하는 것이 조직 생활의 기본이고, 제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느껴져도 그것을 관철시키는 방식은 '제시'와 '설득'이어야 합니다. 무조건 밀어붙이면 나이수처럼 통쾌할 수는 있어도, 현실에서는 기피 대상자로 분류됩니다. 그런데도 나이수의 방식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건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귀족적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급식 퀄리티를 낮추고, 가난한 학생 한바탕을 금전 요구와 폭행 혐의로 몰아 퇴학시키려 했을 때, 어른들은 아무도 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수만 탄원서를 들고 나준을 찾아갔습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급한 마음에 차가 오는데도 먼저 발을 내디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 차가 멈춰주겠지라는 생각에 갔던 것인데 그때 제 아이들이 저를 질책했습니다. 차가 보이면 무조건 멈춰야 한다고 분명히 얘기해 줍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시선이 더 옳았으니 말입니다. 나이수가 어른들의 비리를 걷어내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 순간이 겹쳐 보였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게 있다면 바로 내재화된 순응입니다. 내재화된 순응이란 외부 압력 없이도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게 되는 심리 상태로, 조직 문화 연구에서는 이를 '자발적 침묵(voluntary silence)'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래 일하다 보면 이 침묵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직장생활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가치는 사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나이수가 이사장 선출 투표 자리에서 밝힌 말처럼, 학교는 학생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교육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그 본질을 지키는 데 나이도 자격도 관계없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실제로 국내 청소년의 공정성 인식에 관한 연구에서도 학생들이 어른보다 공정함에 대한 감수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나이수처럼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수처럼 생각하는 순간을 완전히 지워버리면 안 된다고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 느꼈습니다. 적당히 눈치를 보되,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게 제가 이 드라마에서 건져 올린 결론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XKzLQU9LN8&t=243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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