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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재능과 노력, 정년과 영서, 엄마의 사랑)

by eunhaji 2026. 5. 19.

 

소리꾼이라는 주제는 제가 그다지 흥미롭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김태리 배우의 판소리를 듣고 배우가 소리도 한다는 것이 흥미로워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재능 있는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별 기대함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전 김태리의 연기에 압도당하면서 순식간에 빠져들었습니다.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제 아이들 얼굴이 겹쳐 보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재능과 노력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현실적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습니다.

재능과 노력

드라마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국극(國劇)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집니다. 여기서 국극이란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전통 음악극 장르로, 창과 연기, 춤을 동시에 구사해야 하는 고도의 종합예술입니다. 이 무대에서 정년은 타고난 천구성(天口聲)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는데, 천구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리꾼의 자질, 즉 훈련 없이도 청중을 압도하는 목소리와 표현력을 뜻합니다.

반면 허영서는 명망 높은 집안 출신의 노력파로, 완벽한 기술을 갈고닦으며 매란국극단의 에이스 자리를 지켜온 인물입니다. 처음 이 두 인물의 구도를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영서 쪽에 더 감정이 이입됐습니다. 제 첫째 아이가 딱 영서와 같았습니다. 성실하고 꾸준히 노력하는데, 크게 애쓰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오는 둘째를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억울해하는지 엄마인 제 눈에는 보였습니다.

재능과 노력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연구자들도 오랫동안 논쟁해 왔습니다.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이 제시한 '의도적 연습(deliberate practice)' 이론에 따르면, 전문가 수준의 역량은 타고난 재능보다 1만 시간 이상의 체계적이고 집중된 훈련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드라마 속 영서가 보여주는 끝없는 반복 훈련과 자기 분석이 바로 이 의도적 연습의 전형입니다.

정년과 영서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사실 정년이의 설정이었습니다. 엄마 용례가 전설적인 소리꾼 최공선이었다는 것, 즉 좋은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배경이 깔려 있어 그런것 같습니다. 재능 없는 저 입장에서는 솔직히 '그러니까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정년이가 순수하게 아무 배경 없이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력형 인물이었다면, 영서와의 구도가 훨씬 더 입체적이고 건강한 경쟁 서사가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천재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은 정년이도 드라마에서는 누구보다 노력합니다. 천재가 노력하면 아무도 못 이기지만 실수하는 법이 있습니다. 정년이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무리한 연습으로 독공까지 하였습니다. 독공(獨工)이란 스승이나 동료 없이 홀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소리 수련 방식을 의미합니다. 정년이 합동 공연 오디션을 앞두고 동굴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혼자 소리를 갈았다가 목을 망가뜨리는 장면이 바로 독공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방법 없는 열정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드라마는 꽤 직설적으로 경고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제 첫째 아이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억울함을 혼자 삭이며 무리하게 공부 시간을 늘리는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방향 없이 시간만 쏟는 것이 아이의 가능성을 오히려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그 옆에서 더 제대로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는 반성도 했습니다.

후반부에 영서가 정년의 실력을 결국 인정하며 "새로운 왕자"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장면이 현실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더 뭉클했습니다. 질투를 넘어서 상대를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성장입니다. 아동심리 전문가들도 경쟁 상황에서 형제자매 간 건강한 자존감 발달을 위해서는 비교보다 각자의 성취를 개별적으로 인정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출처: 육아정책연구소).

엄마의 사랑

제가 이 드라마를 통해 얻은 가장 실질적인 힌트는 사실 화려한 재능 이야기가 아니라 용례라는 인물에게서 왔습니다. 전설적인 소리꾼이었지만 어떤 이유로 소리를 포기했고, 그 상처 때문에 딸의 길까지 막으려 했던 엄마. 자신이 실패했으니 딸도 실패할 거라는 두려움으로 사랑을 표현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솔직히 비슷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포기했거나 잘 못 했던 것들을 아이들이 하려 할 때 먼저 걱정부터 앞서는 그 마음이 있습니다. 

소복이 정년에게 했던 말, "엄마의 그늘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조언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엄마인 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현실 속에서 너무 많이 부딪히고 수습해야 하는 일들 앞에서 무너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재능이 있든 없든, 결국 스스로 땀 흘려 증명해 내는 과정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뭔가를 해주려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이 쓰러질 때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다짐했습니다. 정년이와 영서가 서로에게 그랬듯, 저도 아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jjDOSA8l3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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