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의 무게
드라마 <카이로스>를 보면 단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한 가족의 운명을 어떻게 뒤바꿔 놓는지 아주 촘촘하게 보여줍니다. 10월을 사는 김서진과 9월을 사는 한애리가 서로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타임 크로싱 장르물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몰입감을 선사했습니다. 사건의 복선과 개연성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연출은 정말 훌륭해서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극 중에서 인물들이 겪는 비극의 깊이가 너무나 가혹하고, 매 순간 치명적인 위기와 배신이 이어지다 보니 시청하는 동안 마음이 자꾸 졸이고 피로해지는 비판적인 아쉬움도 살짝 남았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비극을 겪어야만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는 걸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그때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순간들이 참 많지 않나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어넘겼던 일이나,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전화로 “밥은 먹었냐” 물으실 때 바쁘다며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었던 기억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가볍게 나눌 수 있었던 다정한 말 한마디를 시원하게 건네지 못하고 침묵으로 지나쳐버린 순간들도 떠오르고요. 드라마처럼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기적 같은 전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과의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금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강현채였다면
드라마 속 강현채라는 인물은 겉으로는 완벽하고 우아한 아내이자 엄마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냉혹한 욕망과 위험한 비밀을 품고 가정을 위기로 몰아넣는 비극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극 중 강현채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이 답답하거나 현실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순간적인 흔들림이나 유혹을 느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가슴 한구석이 헛헛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외로움이 밀려오는 순간도 분명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저였다면, 아무리 순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외롭다 할지라도 나를 믿고 의지하는 아이들과 한 울타리를 이룬 가정을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지켜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이다 보니, 어떤 화려한 욕망이나 순간의 감정보다 소중한 건 내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와 가정의 평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집에서 초등학생 두 아이가 쫑알거리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남편과 함께 식탁에 앉아 소소한 하루를 나누는 일상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입니다. 학부모 모임이나 친구들 모임에 나가 사치스럽고 화려해 보이는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내 가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얻어야 할 화려함은 없다고 믿습니다. 순간의 흔들림이 찾아오더라도 나를 믿어주는 가족의 눈빛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내 울타리를 지켜내는 단단한 엄마이자 아내로 남아 위험한 선택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김서진이라면
만약 제가 주인공 ‘김서진’이 되어 이 드라마의 흐름과 결말을 내 성격대로 다시 각색해본다면 어떨까요? 극 중 김서진은 유중건설의 최연소 이사로서 오직 성공만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차가운 엘리트였습니다. 그 결과 딸을 잃고 아내의 배신을 겪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만약 제 성격대로 드라마를 다시 써본다면, 저는 서진이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기 훨씬 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인물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회사 일에만 몰두하며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 퇴근길에 딸 다빈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 들고 일찍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따뜻한 가장의 모습을 담는 것입니다. 제가 평소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통'과 '진심'입니다. 직장에서도 성과나 실적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마음을 먼저 살피려 애쓰고, 부모님을 찾아뵐 때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래서 각색된 드라마 속 김서진은 과거의 애리와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정보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온기 어린 동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차갑고 냉혹한 능력자의 성공기보다는, 어긋난 관계를 진심 어린 대화로 되돌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함께 성장해가는 따뜻한 인간적인 드라마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시청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을 남기는 진짜 명작이 되지 않을까요?